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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세상

에피소드1. 좋은 사람, 담 부장

담 부장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제일 먼저 출근했다. '역시 나처럼 부지런한 리더는 없어.' 말쑥한 슈트 차림으로 사무실에 등장한 그는 오늘도 자신보다 먼저 출근한 팀원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기만족감에 취해 하루를 시작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겉보기엔 근면성실한 담 부장은 회사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인사팀장과도 절친한 사이였고, 재경팀장과는 서로 형동생하며 절대적인 신뢰의 관계를 자랑했다. 그는 늘 유쾌하고 다정했으며, 경조사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사람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모습은 기획조정팀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팀원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와 아침 인사를 건넸지만, 담 부장은 제대로 받아주기는커녕 눈 한 번 마주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경력직으로 들어온 호들갑 과장이 "부장님, 오늘도 역시 제일 먼저 나오셨군요!" 하며 아침부터 아부를 늘어놓아도, 담 부장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뒤이어 환장해 차장, 표독심 대리, 우사원, 남사원도 출근하며 인사를 건넸지만, 담 부장은 그 누구의 인사에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특히 몇 개월 전 임금피크제를 지나면서부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팀원들에게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리더였다. 그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
담 부장은 기획조정팀의 팀장이었다. 부서는 회사의 미래 전략을 짜고 부서 간 조율을 해야 하는 중요한 부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서로 유명했다. 그는 회사에서 팀장으로서의 대우, 팀장 고과, 팀장 처우, 팀장 복리후생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부서가 해야 할 업무나 조직관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리더 때문에 기획조정팀 역시 투명인간 같은 부서가 되어가고 있었다.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의사결정 테이블에 담 부장이나 기획조정팀 실무자들은 더 이상 불려가지 않았다. 대신 다른 부서에서 회의 결과나 결정 사항을 기획조정팀에 일방적으로 통보해올 뿐이었다.

회사에서는 "기획조정팀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팀원들 역시 자신들의 부서가 회사의 흐름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팀원들과 중요한 내용은 절대 공유하지 않는 담 부장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능력 있는 팀원들은 자신의 역량을 업무로 어필하고 싶어 했지만, 담 부장은 자기 팀원이 나서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의사결정을 회피했고, 책임은 사라졌다. 문제가 생기면 잠시 자리를 비워 다른 부서에서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는 팀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했고, 팀은 실패도, 성공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담 부장은 회사 내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알게 되더라도 절대 팀원 전체에게는 공유하지 않았다.
업무를 꼭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대신 한 사람에게만 최소한의 정보만을 흘리듯 공유하고 일을 지시했다.
심지어 담당자가 정해져 있는 업무임에도 다른 사람을 시켜 모든 사람들이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조용히 시킨 '그 일'을 한 사람에게만 고과를 주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조직 운영은 팀을 산산조각 냈다. 각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담 부장의 '그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렸고 팀은 협업하는 대신 '그 일'을 독점하기 위한 경쟁 관계가 되었다.
팀원들은 혼자만 '그 일'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에게 거짓말하고 정보를 감추는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
팀워크는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모두가 고립된 팀이 되어버렸다.

담 부장은 오늘도 퇴근길에 먼 지방까지 내려가 다른 부서 직원의 장례식장 조문을 갔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먼 길 마다않고 찾아온 그에게 "담 부장님,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기획조정팀은 이런 리더가 있어서 든든하겠어요."라며 덕담을 건넸다.

그 대화가 오가는 사이, 담 부장은 그 누구보다 쾌활하게 웃고, 유머를 던지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성 좋은 리더', '넉살 좋은 부장님'이라고 칭찬했고, 그는 그 칭찬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